百濟 王興寺는 威德王 昌이 577년 2월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 『목탑지출토청동사리함명문』은 刀子로 붓으로 쓰 듯 새긴 것이다. 서체는 북조체가 주류이나 남조체의 필법이 가미되어있는 것은 『무녕왕능묘지』와 같다. 이런 서사문화 현상은 당시 백제의 문화가 남조보다는 북조의 서사문화에 익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필획법은 북조의 필획법이 主로 사용되었으나 어떤 부분은 남조의 필획법도 혼용되었다. 『능산리사지출토목간』(6세기초)·『安樂王墓誌』(512)·『무녕왕묘지』(525)·『무녕왕비묘지』(529)·『무녕왕능매지권』(525) 등과 같은 서법이다.
결구는 대부분 정방형의 예서결구가 주로 사용되었고, 갸름한 장방형이 있다. 북조법의 영향을 받아 세로획이 강조된 마름모꼴 결구가 있다. 정방형의 결구는 북조결구이고 갸름한 장방형의 결구는 남조결구로 분류할 수 있다. 결구도 남북조의 결구가 혼용되었다.
장법은 남조의 행서·해서에 사용되는 字間이 좁고 行間은 넓은 장법을 사용하였다.『무녕왕묘지』(525)·『무녕왕비묘지』(529)·『무녕왕능매지권』(525)등의 장법은『사리함명문』과 같이 남조에서 유행한 행서나 해서의 장법이다. 刀法은 붓으로 쓰듯 새긴 것이다. 즉 도법을 필법과 같이 사용하였다.
필획과 결구, 장법과 도법을 정리하면 필획과 결구는 남북조의 필법을 혼용하였고, 장법은 남조의 장법을 사용하였으며, 도법은 필법과 같은 용필법으로 도자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남북조의 서사문화가 혼합되어 사용된 점에서 당시 정세가 복잡했던 대륙과의 문화교류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안락왕묘지』(512)의 필법관계와, 북제에서 한시적으로 사용되었던 常平五銖錢의 출토를 통하여 대륙과의 문화소통이 반세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음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