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인들과 중국 대륙
1. 중국 대륙 속의 백제
2. 13세기의 백제
3. 중국 속의 백제인과 백제 속의 중국인들
Ⅲ. 백제 멸망 후의 백제인들
1. 黑齒常之
2. 沙吒忠義
3. 禰寔進
4. 扶餘文宣
Ⅳ. 맺음말
요약
백제는 중국 대륙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사서에는 백제가 중국의 일각을 경략하거나 크게 위협했던 흔적뿐 아니라 北魏軍과 교전 기록도 보인다. 정치적으로 백제는 중국의 책봉 체제에 들어갔지만, 남북조의 분립기를 이용해서 중국에 일정한 거점을 확보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점 차후 좀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할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백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승려나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에 백제는 중국과의 충돌도 빚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한다. 백제의 해외 거점은 중국 대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 아시아 일원에 미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여씨 왕족 출신이었던 흑치상지 가문의 조상들이 그러한 사례를 말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숱한 물질 자료와 문헌적인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일단의 지배층들이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에 전개된 조국회복운동과 웅진도독부의 해체를 통해 백제인들은 일본열도뿐 아니라 다시금 중국 대륙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중국의 당에서 거주하게 된 백제인들은 대부분 軍職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당을 위협하던 토번이나 돌궐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에 거주하는 백제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당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배경으로서는 이만한 분야 외에는 없었기에 군직에서 주로 활약했던 것 같다. 또 이것이 많은 명장들을 배출하게 된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흑치상지를 비롯한 백제 출신 장군들은 고구려계 인물들과 마찬 가지로 모반이라는 무고를 덮어쓰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들에 대한 이용 가치가 사라진 대신 唐군부에 기반을 구축할 수 없게끔 도려내는 작업을 한 것이었다. 끝으로 13세기대에 중국 주변에서 확인되는 ‘백제’의 존재에 대한 추적을 시도하여 탐라와의 관련성을 모색해 보았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