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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기록화 양상 연구

  • 분류 문헌 > 기타
  • 권호수 제47권
  • 저자 변종현
  • 발행일 2010년 12월
  • 게재지 배달말
  • 발행처 배달말학회

목차

I. 머리말
II. 서동설화의 기록화 양상
2-1. 역사적 사실의 기록
2-2. 설화적 사실의 기록
2-3. 역사와 설화의 통합
III. 서동요의 기록화 양상
IV. 맺음말

요약

서동설화를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입증이 되고, 미륵사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터가 습지였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동이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흙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라 여겨진다. 즉, 익산과 인접한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는 채금하던 곳이 수십 곳이 남아있고, 지금도 금구면에서는 겨울철에 沙金을 채취하고 있다. 師子寺에 거주했다는 知命法師는 서동설화에서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현재 미륵산(용화산) 정상 밑에 있는 獅子菴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명법사가 거주했다는 師子寺와 같은 절임이 확인되었다.
서동설화에서 설화적 사실은 무왕의 탄생담과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 지명법사의 신력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武王은 法王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외아들이거나 후궁 출신 비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궁의 소생이라면 ‘어머니가 홀로 되어 못에 있는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무왕이 용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것은 신화적 영웅들이 그러한 것처럼 신이한 출생담을 가지게 되었다. 무왕은 역사적 인물에서 민중들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영웅적 인물로 새롭게 그려진 것이다. 서동설화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이기 때문에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은 아버지인 법왕의 불심에 감화를 받아 익산 지역에 왕흥사(미륵사)를 세우게 된다. 왕흥사는 창건한지 34년만인 634년에 완성되었고, 당시 백제인들이 작성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인 佐平 沙乇積德의 따님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화공주는 설화적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은 입증하기 어려우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당시 신라에서 적대국가인 백제에 선화공주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미륵사터인 연못을 知命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神力으로 메꾸었다는 사실도 역사적 사실과 불교적 영험이 결합되어 형성되었다. 즉 미륵사지는 발굴 과정에서 습지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결국 미륵사터는 연못을 메꾸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고, 知命법사는 불교의 영험과 이적을 보여준 고승으로 그려져 있다. 서동요는 사뇌가 형식의 노래와는 다른 민요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노래이다. 초기 연구자들은 대체로 무왕이 창작한 노래로 보았으나, 후대 연구자들은 서동이라는 인물이 구비전승되던 동요에 서동과 선화공주를 넣어 개작하였다고 보았다. 이 노래를 서동설화 속에서 읽지 않고 노래 자체만을 가지고 부를 때에도 이 노래의 동요적 성격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노래는 현재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인 ‘얼레꼴레리’라는 노래와 비슷한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다. 서동요는 오랫동안 익산과 부여지방에서 구비전승되다가 일연스님에 의해 기록화되었는데, 노래말의 내용 가운데 ‘원乙’은 <삼국유사>의 같은 글자의 용례로 볼 때에 ‘알을’로 해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서동요는 사랑의 주가나 사회 변혁을 예언하는 참요, 하층민들의 신분상승욕구가 반영된 노래로 바라보기도 하고, 이 노래를 불교적 성격을 가진 노래로 파악하여 선화를 미륵선화로, 서동을 미륵으로 이해하여 미륵하생 신앙을 표현한 노래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필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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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 문화 서동설화와 서동요
    • 발행처배달말학회 
    • 저자최용수 
    • 발간년도 
    • 게제지배달말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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