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의 가림성 축조는 하나의 산성 축조의 의미보다도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동성왕은 웅진 천도 이후 어느 정도의 안정을 회복하고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웅진교를 가설하고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웅진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지정학적인 요충지이긴 하였으나 한 국가의 왕도로서는 적합하지 못하였다. 동성왕은 사비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수차의 지형을 탐색한 이후 드디어 사비지역으로 천도의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의 실천의 하나로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가림성을 축조함으로써 서해로부터 사비에 이르는 교통로의 확보와 사비지역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가림은 금강으로부터 사비에 이르는 요충일 뿐만 아니라 사비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필수적인 위치였던 것이다. 즉 동성왕의 가림성 축조는 바로 동성왕의 사비천도 계획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웅진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백가의 저항으로 동성왕이 그에게 시해됨으로써 동성왕의 사비천도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성흥산 밑의 가림성에 인접한 상황리와 하황리에서는 왕릉급의 백제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수준 높은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들의 고분과 유물은 바로 사비시대 이후 제일 귀족으로 행세하게 되는 백제의 사씨세력 근거지로 추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가림성은 그의 구조가 단순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내성, 외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으며,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도 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직 석축으로 되어 있는 부분만을 백제에 축조된 산성으로 이해함으로서 백제 석축산성의 전형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가림성 동쪽으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백제시대의 토축 성벽을 분명히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처음 축조되던 웅진시대는 토축으로 가림성을 축조하였으며, 그의 규모 또한 현재의 석성보다 동쪽의 토루부분을 포함하는 훨씬 규모가 큰 토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사비시대의 말기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석축으로 개축하면서 그의 규모를 축소함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남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의 축성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비도성과 가림성을 축조하는 시기까지는 주로 토축의 산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