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무왕대의 정치적 상황
Ⅲ. 익산의 역사지리적 위치
Ⅳ. 무왕의 익산경영
Ⅴ. 맺음말
요약
백제의 무왕대 이루어진 익산지역에 대한 천도설이나 별도설 경영설 등은 주로 무왕의 권력강화라는 측면에서의 설명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나 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마한, 백제,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곳이다. 익산지역은 지리적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북상하기 위하여, 또는 차령과 금강의 북쪽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군사적인 최대의 요충지인 곳이었다. 그런데 무왕대에는 물론 약화된 왕권의 강화가 우선 시급하였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시급하였던 사실은 바로 신라에 의한 한강유역의 상실, 그리고 가야지역의 상실에서 오는 위기감의 극복이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무왕의 초기에 4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음을 보면 내부적인 당시의 왕권강화는 신라에 의한 고립으로부터의 탈출보다 시급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무왕은 3년에 전라도의 운봉지역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의 전투에서 패하자 무왕은 이에 대한 집념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하기 위하여, 또한 만약 신라의 공격이 있을 시에도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하였던 군사적인 요충지인 익산지역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결과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여 불력으로 신라를 제압하려 하는 한편 승려들을 승군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 점에서 미륵사를 이곳에 창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왕은 이곳의 행차시에 머무를 이궁을 건설하고, 군대의 상주를 위하여 산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왕의 일연의 행동들이 바로 무왕의 익산경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존의 무왕의 익산경영의 이유를 왕권의 강화라는 목적으로 해석하여 왔음에 대하여, 당시의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가야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던 신라와의 국운을 건 전쟁 관계에서 군사적인 요새지인 익산의 경영이 이루어졌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