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년에 완성된 『日本書紀』는 수십 년 동안 백제계 사관의 역사서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推古朝에 최초의 백제계 사관이 등장하여 「國記」를 편찬하였다. 그 「國記」는 『일본서기』 편찬의 시작을 알리를 天武朝의 “記定” 사업의 근간이 되었다. 天武·持統朝에 천황과 씨족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 씨족들은 백제계 사관이 작성한 대외관계기사를 바탕으로 조상들의 활약상을 과대 포장하였다. 이후 율령 국가의 시작인 文武朝를 거치면서 체재 등의 골격이 완성되고, 『일본서기』 편찬의 최종단계인 元正·元明朝에도 많은 백제계 사관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대 유명한 문인들로 『일본서기』의 문장이나 체재를 정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백제계 사관은 일찍이 백제왕이 보냈거나, 망명 백제인들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백제계 사관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의 내력이나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겠지만, 당대 가장 큰 세력가인 藤原氏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백제계 사관들은 藤原氏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머물고 있던 곳은 공통적으로 畿內, 그 가운데에서도 河內 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 이들은 서로 동족관계를 맺고 기내의 유력씨족들과 결탁함으로써 계속해서 사관집안 혹은 유명한 문인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에 계속 투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일본서기』 이후의 사서 편찬에도 참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