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현존하는 南京博物院舊藏의 北宋摹本과 남송대 樓鑰이 傅欽甫所藏 「職貢圖」 所見, 그리고 새로 알려진 張庚摹本에 보이는 「梁職貢圖」 百濟國記와 『梁書』 百濟傳을 비교, 검토한 것이다.
첫째, 현존 「梁職貢圖」 百濟國記는 「梁職貢圖」 原圖에 기재된 본래의 내용은 아니다. 모두 북송이래 摹寫過程에서 節文과 改文이 이루어 졌다. 이는 남아있는 題記분량을 통해서 쉽사리 알 수 있다. 분량은 北宋摹本이 가장 많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가장 풍부하다. 그러나 張庚摹本이 소략하지만 역사+교섭+풍속 순으로 기재된 주요구성은 남기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北宋摹本의 百濟題記의 原文과 사료의 계통은 같았다고 생각된다. 張庚摹本百濟國記는 起源+交涉+服飾기사를 骨幹으로 原文을 縮約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이는 「梁職貢圖」가 使臣圖가 중심이며 旁題의 題記는 人物像과 해당 국가에 대한 간략한 정보 제공이 목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둘째, 北宋摹本과 樓鑰이 傅欽甫所藏 「職貢圖」 題記를 抄錄한 경우, 樓鑰抄錄은 28字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北宋摹本에 보이지 않는 新記事라 할 만 하다. 특히 天監11년(512) 朝貢記事는 『梁書』 百濟傳에도 누락된 기록이다. 이는 양직공도를 대본으로 작성된 『梁書』 百濟傳의 내용상의 모순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 「梁職貢圖」 百濟國記 佚文 三例와 『梁書』 百濟傳을 비교해 보자. 그 동안 百濟의 旁小國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北宋摹本 百濟國記의 내용이 반영되었고, 이에 없는 것은 『梁書』 찬자가 보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梁書』 찬자가 보충한 내용이 『梁書』 百濟傳 말미에 附記되어 있으나, 전반부는 「梁職貢圖」 百濟國記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北宋摹本 百濟國記에 없는 내용이 『梁書』 百濟傳 첫 머리에 보이지만, 이 또한 樓鑰抄錄을 보면 「梁職貢圖」 百濟國記에 의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樓鑰抄錄에 보이는 天監11년(512) 朝貢記事는 『梁書』武帝紀에 기록된 天監11년(512) 朝貢記事와 부합한다. 더욱이 『梁書』 百濟傳의 天監元年과 普通二年기록 사이에 논리적 모순을 해소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곧 『梁書』 百濟傳에 天監11년 조공기사가 들어간다면, 武寧王이 寧東大將軍에 앞서 받았던 鎭東大將軍의 受爵年代, 그리고 「普通二年王余隆始復遣使奉表」문구 가운데 “復遣”이라한 표현이 이해된다고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