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말기에 정계에서 은퇴한 귀족 사택지적이 세운 <사택지적비>는 654년이라는 건비년으로 인해 그 해서체가 동시대 初唐風이라는 주장과 서풍으로 본 南北朝風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왔다. 따라서 본고는 이 두 서풍과의 비교를 통해 <사택지적비> 서풍의 참모습을 찾아보고자 했다. 본고를 통해 웅진시기의 서풍이 그러하듯, 사비시기의 <사택지적비>도 瘦勁한 초당풍이 아닌 雄强茂密하면서 流麗典雅한 남북조풍의 해서를 모범으로 삼고 남북조 서풍을 통합한 수나라 서풍 도 약간 섞어 백제풍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당풍이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시기에 백제에서 쓰인 이러한 남북조풍의 형성배경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여 택한 오랜 기간 익숙했던 백제의 남북조풍 취향이다. 백제는 200년 이상 주로 중국의 남방문화를 흡수하여 세련된 백제문화를 형성했다. 반면 사비시기 말 국제 정세에 발맞추어 당과 활발한 교섭관계를 가졌으나 그 기간은 불과 30여 년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652년 이후부터 멸망할 때까지 당과 斷交하여 <사택지적비>의 건립년인 654년 전후에는 대당교섭이 없었다. 둘째, 백제의 남조 글씨에 대한 흠모다. 고구려, 신라, 일본이 초당 歐陽詢의 글씨를 좇을 때 백제는 남조 양 무제가 극찬한 명서가 蕭子雲의 글씨를 보물로 삼았다. 그것이 사비 천도(538) 후이니 힘차면서 유려한 남조 글씨가 사비시기 동안 당연히 중히 쓰였을 것이다. 이러한 형성배경을 가지고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택지적비>의 글씨는 남북조 글씨에서는 보기 힘든 고고함과 세련됨, 힘참과 유려함을 지녀 백제인의 性情을 드러내는 백제글씨의 精髓라고 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