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奉安記가 말하는 몇몇 情報
Ⅲ. 백제의 王妃와 그 지위
Ⅳ. 武王條와 봉안기
Ⅴ. 맺음말
요약
2009년 1월 초 전북 익산에 자리한 미륵사지 西塔에서 예기치 않게 출토된 舍利奉安記(이하에서는 봉안기로 줄임)의 내용은 기존의 史書上에 보이는 그것과 크게 달랐다. 미륵사의 西塔 건립이 마침내 백제 武王의 왕비로 등극한 신라 眞平王의 셋째 딸 善花公主가 아니라 佐平인 沙탁積德의 딸이 주체였다는 새로운 정보였다. 王妃라는 점에서는 합치하지만 주체가 달랐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미륵사 창건의 발의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선화공주의 實存조차 의문으로 부각되는 등 크게 논란이 일기 시작하여 백가쟁명의 양상을 보였다.
지금까지 봉안기를 다룬 연구를 대충이나마 훑어보면 합의된 이해가 도출되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특히 연구방론상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점을 반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몇가지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첫째, 봉안기에 따르면 일단 무왕의 왕비가 발원하고 그녀의 친정인 사탁씨의 私財를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틀림없다. 다만 미륵사가 3院式인 만큼 그 전부가 대상이었는지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둘째, 639년은 서탑의 사리봉안을 시행한 해라고 한정적으로 이해함이 옳다. 미륵사 창건 작업은 이미 그 이전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셋째, 백제는 일부다처제가 통용되던 사회로서 일시에 여럿의 왕비가 존재하였다, 백제 왕비의 위상이 전반적으로 낮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러 명의 왕비 가운데 오직 사탁씨 왕후만이 미륵사 창건과 연관되어 있는지 아니면 다른 왕비도 가담하였는지는 봉안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왕조의 기사와 봉안기를 쉽게 연결시키는 데는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장차 무왕조의 기사를 대상으로 삼아 좀 더 철저한 분석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