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木簡資料를 중심으로 신라의 표기법과 백제의 표기법을 각각 정리한 다음, 이들을 서로 대비하여 그 異同을 논의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신라의 금석문과 고문서 등의 기존 자료 중에서 (A) 한국어 어순에 따라 표기하고 (B) 한국어 문법 형태를 드러내어 표기한 최초의 자료는 戊戌塢作碑(578년)이다. 그런데 신라목간까지 포함하여 기술하게 되면, 그 최초의 예가 6세기 중엽의 함안 성산산성 221호 목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목간은 (A)와 (B)뿐만 아니라 (C) 訓主音從과 末音添記의 표기법까지도 적용했다는 점에서 最古의 한국어 자료이자, 最高級 이두 자료이다.
신라목간에서는 6세기 중엽의 자료에서 8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훈주음종과 말음첨기의 표기법이 두루 적용되었다.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 ‘文尸[*글]’(4회), ‘蒜尸[*마날]’, ‘糸利[*시리]’, ‘四刂[*너리]’, ‘彡利[*터리]’, ‘益丁[*더뎡]’, ‘丨彡[*다삼]’ 등을 찾을 수 있고, 하남 이성산성, 경주 월성해자, 경주 박물관터, 경주 안압지 등의 목간에서 ‘大舍[*한사]’(3회), ‘赤居[*블거]’, ‘有史[*이시]’, ‘三(巳+一)[*사답]’, ‘一(巳+一)[*하답]’, ‘㫑史[*맛]’(6회) 등을 찾을 수 있다. 신라목간 자료에서 적어도 13개의 훈주음종 표기를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서 훈주음종 표기가 신라의 보편적 표기법이었고, 6세기 중엽에 이미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백제목간에서는 훈주음종과 말음첨기의 표기법을 찾을 수 없다. 신라목간에서 말음첨기자로 활용되었던 ‘只, 尸, 乙, (巳+一), 叱’와 음차자로 사용되었던 ‘居, 伊, 史, 舍, 知’ 등이 백제목간에서는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이에 따르면 이 글자들이 이용된『三國史記』地理誌의 백제 지명 표기가 통일신라 표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백제에서는 단어를 표기할 때에 훈주음종과 말음첨기의 표기법 대신에 음차자 위주의 표기법과 훈차자 위주의 표기법을 적용했던 것 같다.
백제의 문장 표기에서는 (A) 한국어 어순이 분명히 확인되지만 (B) 한국어 문법 형태 표기는 ‘之,也, 中, 以, 者’ 등으로 한정된다. 이들은 초기의 신라 이두 자료에서 발견되는 글자들과 일치한다. 그런데 백제 자료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읽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것도 백제목간과 신라목간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