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나제동맹'의 재검토
III. 나제동맹기 군사활동을 통해 본 나·제 관계
IV. 나제동맹의 결열과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
V. 결어
요약
5세기 후반 고구려의 공세는 주로 신라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나제동맹을 통하여 고구려의 공세를 차단함과 동시에 신라 영토 내에 세력을 부식시켜 온 고구려 幢主를 소백산맥 이북으로 몰아냄으로써 자국 영토에 대한 철저한 통치력을 관철시킬 수 있게 되었다. 504~554년은 신라가 나제동맹에 임하는 자세는 크게 달라졌다. 먼저 신라는 內的성장과 자기 발전 도모에 치중하면서 삼국의 항쟁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의 공세에 시달리는 백제에 대한 동맹국으로서의 구원 의무를 도외시한 채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를 최대한 자제하며 향후 대외팽창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6세기 전반의 나제동맹은 신라의 소극적 태도 일관과 가야 방면에서의 미묘한 대립으로 양국이 갈등상황을 맞고 있었으며, 그의 타개와 함께 마지막 공동방어작전인 548년 獨山城전투가 있었다. 독산성 전투를 통해 한강 하류 유역에서의 군사활동 경험을 쌓은 신라는 그 후 나제동맹의 유지보다는 자신의 國力을 바탕으로 麗․濟의 공방전을 틈타 고구려 道薩城과 백제 錦峴城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백제는 나제동맹의 유지를 위해 신라의 금현성 장악을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551년에 신라와 힘을 합쳐 한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 유역의 고구려 6郡과 남한강 중․상류 지역 10郡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그 직후 553년에는 신라는 나제동맹의 파기를 무릅쓰고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었으나, 백제는 내제동맹의 현상유지와 한성 지역의 반환을 바라며 王女를 신라왕의 小妃로 출가시켰다. 이는 竹嶺 이북 10군을 빼앗긴 고구려가 신라의 그 지역 장악을 인정하며, 오히려 신라와 연결하여 백제에 대한 위협을 가중시킴에 따른 백제의 지구책이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의 장악을 위하여 백제와의 연결보다는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백제는 慶州로부터 한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교통로․작전선을 차단하고자 554년에 가야 세력까지 동원하여 管山城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관산성 공격은 신라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聖王의 戰死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으며 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이 이후 백제는 신라에 대한 산발적 공격을 시도하는 등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나제동맹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