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백제 위덕왕의 대 대화위 불교정책
II. 법흥사 조영과 백제증 혜총의 대화위에서의 활약
III. 법흥사 발굴조사
IV. 「원효사가람록기」의 탑로반명과 장육광명
맺는말
요약
백제의 제27대 威德王은 역대의 왕 중에서도 大和倭에 대한 불교정책을 가장 줄기차게 밀고 나간 왕이었다. 威德王은 大和倭 정책은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화왜의 정치 전반에 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威德王의 불교정책은 그러한 정치의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그는 백제의 관인과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大和倭의 정치를 지도하고 통솔하였으며 또한 승려를 파견하여 일본 불교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易博士․曆博士․醫博士․採藥師․藥人 등도 大和倭 파견하여 각각의 분야를 지도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불교정책의 하나로 威德王은 백제의 官人․僧과 각종의 佛寺조영 전문 기술인으로 구성되는 法興寺 조영팀을 大和倭에 파견하여 大和倭 최초로 楚石立柱의 기와집인 法興寺를 조영하였으며, 百濟僧 惠總으로 하여금 수시로 대화왜에 파견하여 법흥사의 조영과 포교와 大和倭 불교의 동량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법흥사의 발굴조사보고서는 백제불교의 물질적 기초를 확인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으나 후세의 언젠가 만들어진 「元興寺伽藍錄起」의 「塔露盤銘」과 「丈六光銘」은 진실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요컨대 法興寺는 大和倭의 蘇我氏가 세운 사찰이 아니며 百濟의 위덕왕의 對大和倭 불교정책의 하나의 구체적인 불사(佛寺)로 나타난 사업이며 위덕왕이 百濟의 관리로 하여금 법흥사 조영전문인단을 거느리고 가서 조영케 한 사찰인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