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자왕은 즉위 초 정변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추론은 무왕이 641년 3월에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의 사건으로 『일본서기』 皇極원년(642)조에 기록된 國主母의 죽음. 弟王子등과 같은 근친왕족들에 대한 被放사건과 결부지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입론근거가 되었던 황극원년조의 기사는, 「사택지적비문」같은 금석문자료와 결부지어 검토하면서 전후상황을 살펴볼 때, 錯亂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황극원년조의 정변기사는 제명원년(655)조에 배치되어야만 하겠다. 錯亂의 원인은 황극과 제명은 동일인물이지만 복벽되므로 인한 혼동으로 기사가 잘못 배치된 것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일본서기』의 7세기 대 기사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한결같이 기사배열의 錯誤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의자왕의 정변은 재위 15년(665)에 단행된 것이 되는데, 이는 의자왕대 정치사가 그 1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이뤄진다는 종전지적과도 잘 연결이 된다. 그러나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기존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전제왕권의 후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자왕 15년의 정변은 지배세력의 교체와 더불어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3)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의자왕 재위전반은 그가 해동증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귀족권과의 마찰이 없었던 타협의 시기였다. 반면 그 후반은 국왕을 축으로 하는 일대 세력 재편성기였으므로, 왕권과 귀족권과의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었으나 의자왕은 왕권강화에 반발하는 귀족세력들을 대거 제거했다. 의자왕의 淫荒과 耽樂은 견제세력을 거의 제거한 데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판단되므로, 권력의 일방 독주가 가능한 강력한 왕권의 구축을 뜻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老衰한 의자왕이 淫荒과 耽樂에 몰입하도록 조장하고 그것을 틈타 권력을 오로지 한 이가 왕비였던 恩古였다. 4) 의자왕대의 태자위는 隆에서 孝로 교체되었는데, 孝의 어머니는 은고로 간주하는게 옳을 것 같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