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초기 伯濟國의 중심지와 目支國의 세력범위
3. 伯濟國의 河南 移住 시기와 배경
4. 伯濟國의 성장과 目支國 연맹체의 解體
5. 나머지 말
요약
마한에서 백제로의 전환과정에서 마한지역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진행되었다. 변화의 단초는 魏의 동방진출과 高句麗, 東濊, 韓 등 토착사회에 대한 강경책이었다. 이중 마한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군현세력에 인접해있던 경기 북부지역의 韓濊와 魏 郡縣 사이에 일어난 무력 충돌과 저항이었다. 이 과정에서 帶方郡 崎離營 공격의 주도세력이었던 백제국이 보복을 피해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였고, 공격에 참여하였던 경기북부지역의 韓濊세력이 魏에 항복하였다. 결과적으로 백제국의 하남이주는 목지국 진왕 세력권과의 충돌을 초래하였고, 아산만 일대를 구심점으로 형성되었던 목지국소국연맹체의 맹주가 백제국으로 교체되는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백제국의 팽창과 목지국세력권의 해체는 여타의 마한지역 정치집단들을 자극하여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30여국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조직체를 새로이 출현시켰다. 이처럼 마한지역 제 세력간의 力學관계가 재편되는 것은 240년대에서 280년대에 이르는 시기로 생각된다. 뒤이어 3세기말~4세기대에 걸쳐 서울지역에서는 대규모의 積石塚이 축조되는 등 고고학상으로도 급격한 권력 집중현상이 인정된다. 문헌상으로는 291년 晉에의 遣使를 끝으로 백제와 중국 군현은 새로운 갈등관계에 들어간다. 對郡縣관계의 변화는 목지국세력권의 해체이후 백제가 경기 북부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빚어진 결과로 생각된다. 근래 임진강유역의 연천군 三串里, 鹤谷里, 仙谷里등지에서 백제계 적석총유적이 조사되어 백제의 세력범위와 관련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중 발굴조사를 거친 삼곶리 적석총은 구조는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하거나 출토된 유물은 백제계로 밝혀졌다. 비록 일시적인 제재를 당하기는 하였으나 백제의 경기 북부지역으로의 진출이 313년, 314년 낙랑․대방군의 축출로 본격화되었으리란 추정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남쪽으로의 세력범위와 확대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마한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백제에 통합되어 갔다. 이를 백제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한 토착세력의 병합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여러 차례 중심지를 옮긴 백제사 특유의 전개 과정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백제사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고고학 자료의 구체적 검증을 토대로 마한지역 토착세력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