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東城王 23년 弑害 사건을 검토하여, 이에 대한 성격과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東城王 弑害는 苩加라는 개인의 행동이 아닌 이를 주도한 세력이 있었으며, 이에 武寧王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2장에서는 苩加의 東城王 弑害에 초점을 두고 있는 기존 견해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그 결과 苩加가 加林城 전출이라는 불만 때문에 왕을 弑害하였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정치적 상황 속에서 苩加는 정국을 주도할만한 세력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苩加는 武寧王을 擁立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苩加가 東城王을 弑害하고도 계속적으로 신변에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를 통하여 東城王 23년 政變에는 苩加를 조정한 배후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사의 적임자로 苩加를 끌어들였으며, 武寧王이 집권한 이후 苩加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보인다. 苩加가 武寧王이 執權 이후 반란을 일으키고, 또한 쉽게 항복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3장에서는 東城王 23년 政變을 주도한 세력과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도한 세력은 東城王 정권에서 배제된 南來貴族과 王族들이었다. 東城王 末年에 곳곳에서 民心에 이반 현상이 나타나고 핵심 세력이 점차 측근들에 의해 中央政界에서 밀려나는 상황이 발생하자, 거사를 모의하고 苩加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4장에서는 武寧王의 執權과 관련된 政變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목된 것은 武寧王의 出自에 異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出自에 移設이 많은 것은 武寧王이 血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異說을 검토해 본 결과 東城王의 異母兄이라는 『百濟新撰』의 기사 내용이 가장 타당성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武寧王은 배다른 동생인 東城王이 昆支의 適者로서 즉위하자, 이에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東城王은 末年에 이르러 측근위주의 독선적인 정치로 점차지지 세력을 잃어갔다. 이에 武寧王은 政變의 구심점 역할을 하여 정변을 성공할 수 있었다. 武寧王은 먼저 그의 거사를 國人들에 의한 것으로 정당화시켰다. 또한 武寧王은 그의 혈통상의 문제점과 東城王 정권에서 소외된 南來貴族들과 王族들을 포용하기 위해 蓋鹵王의 아들로 자신의 계통을 연결시켰다. 이를 통하여 母系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新進勢力과 南來貴族․王族을 포함한 汎百濟系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