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중후반 마한관계사료 중 가장 먼저 부각되는 문제는 한과 중국군현의 군사충돌이다. 위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마한 전체였으나, 구체적인 목표는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군사적 대처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한 한 많은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던 백제는 목지국의 협조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한의 대방군 공격은 백제국 중심으로 목지국과의 공동대응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246년의 군사적 충돌 이후 위나 중국군현은 백제 뿐 아니라 마한과 타협을 시도했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일정한 위치를 인정받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중국군현이 조공외교를 변경시키고 있어서 주목된다. 낙랑군이 마한으로 하여금 위 본국에까지 왕래하게 한 것이다. 즉 마한이 본격적인 원거리 국제교역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246년 이후 백제는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목지국 병합은 260년에 있은 체제의 완비와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후 백제는 마한왕인 진왕의 사망과 함께 목지국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이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백제에 의한 목지국의 멸망은 263년경에 이루어졌다. 이를 발판으로 백제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외교교섭을 추진하였다. 그 시기는 276년경으로 짐작된다.
『진서』는 목지국 멸망 이후 백제와 마한의 관계변화를 보여주는 사서이다. 280년을 기점으로 마한의 이름으로 나오는 시기와 마한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모두 백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마한왕위를 계승하여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마한으로의 계속적인 진출을 위하여 대내외적으로 마한의 맹주국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진서』 장화전에서 언급되는 마한관련 기록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20여국의 중국과의 교섭이 신미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미국을 비롯한 국가가 백제에 의해서 비로소 중국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목지국의 멸망이후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해왔던 신미국을 비롯한 20여국이 백제와 연맹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세력약화와 백제와 진 및 군현과의 관계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제는 282년에 들어오면 명실상부한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