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왕대 이후 일시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던 백제와 고구려는 개로왕대에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먼저 고구려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개로왕 즉위초 백제의 불안한 정치정세를 틈타서 공격하였다. 이후 별다른 충돌을 보여주지 않았으나 469년에 들어오면 그 양상을 크게 달리한다. 백제가 고구려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 때 백제의 대고구려공격은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해서 이룬 왕권의 전제화와 국력의 신장을 바탕으로 개로왕이 대외팽창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주목된다.
469년 이후에도 백제는 대고구려강경책을 계속적으로 추구하였다. 그것은 백제의 대북위외교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고구려는 대북위외교를 재개하면서 북위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대북위외교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지적하면서 북위와 고구려의 외교관계를 분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백제는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대북위외교는 북위로부터 거절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제의 대북위외교의 실패는 백제를 고립에 놓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고구려로 하여금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실시하게 만들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공격을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백제의 외교적인 고립과 내부분열이었다. 고구려는 계속적으로 대북위외교와 대송외교를 추진하면서 고구려의 백제공격으로 발생할 외교적 문제를 사전에 없애고자 하였다. 외교적 노력 이외에 백제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장수왕은 백제의 내정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간첩인 승려 도림을 파견하였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대토목공사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도림과 그의 활동을 후원한 세력은 백제의 정계를 크게 분열시켰다. 도림으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이 개로왕 18년 이후의 정치를 주도하면서 개로왕은 정치를 크게 그르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 오던 백제공격을 실제적으로 추진하였다. 고구려군대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다음 한강 이북인 아단성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것은 고구려가 신라에 시도하였듯이 백제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주왕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구려의 압력을 벗어나 백제를 중흥시키기 위해서 웅진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