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능산리 사원의 창건세력
3. 능산리 사원의 창건배경
4. 능산리 사원의 창건을 통해 본 위덕왕대 왕권과 귀족
5. 맺음말
요약
위덕왕대의 정치적 상황 및 불교계의 동향을 중심으로 부여 능산리사원의 창건을 검토하였다.
능산리 사원은 단순히 성왕의 딸인 공주나 위덕왕이 개인적인 관점에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왕의 자녀들이란 점에서 성왕계에서 사원창건을 추진한 것이다. 즉 성왕계 왕족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위덕왕을 중심으로 성왕계 왕족들이 능산리 사원의 창건을 주도한 것이었다.
성왕계가 능산리 사원을 창건한 배경은 관산성 전투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던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조상숭배를 통하여 성왕계 왕족은 가계의 결합을 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추복 이외에 성왕의 왕릉을 관리하기 위하여 능산리 사원을 창건한 측면도 찾아진다. 때문에 성왕계는 성왕을 위한 왕실원찰을 성왕의 능묘 가까이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왕계가 능산리 사원을 창건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원의 창건이 성왕과 관련하여, 위덕왕 14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알려준다. 위덕왕 14년은 위덕왕대에 있어서 성왕계가 즉위초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한 변화과정을 보여준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산리 사원의 창건은 성왕계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이 그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성왕대의 정치적 목표를 계속적으로 추구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능산리 사원은 단순한 왕실사원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불교와 관련된 사찰로까지 발전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능산리 사원은 사리감 제작이 말해주듯이 위덕왕대의 왕권이 석가로 상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석가불의 제작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역시 왕권이 귀족보다 우위의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위덕왕대의 왕권은 완전히 귀족세력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기에 제약이 있었다. 미륵신앙의 유행이 당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귀족세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왕은 귀족과 대립하지 않고 일정한 질서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위덕왕은 45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재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산리 사원의 창건은 위덕왕대 왕권과 귀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