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의자왕대 왕족의 동향을 재검토해 보았다.
의자왕의 왕족은 크게 왕제와 왕자로 나눌 수 있다. 이때 왕제들은 대부분 부여풍의 형제들로,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의자왕의 이모제일 가능성이 높다. 왕자의 경우 태자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의자왕의 첫 번째 태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효가 첫 번째 태자이며, 의자왕의 셋째 아들인 융은 두 번째 태자였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어 의자왕대 왕족들의 활동시기를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 기사를 통해서 자세히 분석하였다. 이것은 황극기 원년에서 기록하고 있는 백제정변 기사가 제명기 원년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의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이 경우 사택지적의 사망시기와 같이 일부 착오 기사가 있지만, 백제정변 관련기사만 쉽게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음을 알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부분만을 분리시킬 경우 황극기 원년의 다른 기사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기의 활동, 백제외교를 수행한 아담련비라부 그리고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서명천황의 죽음에 대한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파견 등의 기사를 통하여 그 점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개별인물의 분석과 사료비판을 바탕으로 왕족의 동향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무왕대와는 달리 의자왕은 즉위초기부터 왕족들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의자왕이 왕권강화를 추구한 결과였다. 이에 왕제인 부여풍 형제들은 왜를 근거지로, 왜와 백제의 외교관계를 이용하는 등 자신들의 정치적 불만을 표시하였다. 한편 태자중심의 정치를 추구한 의자왕의 정책과 함께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왕서자들도 융의 어머니인 은고의 집권 이후 대거 등장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백제가 멸망하자 이들 양세력은 서로 결합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당의 백제고지 지배정책이 바뀌고, 또한 왕족들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면서 그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