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548년 고구려의 독산성침공을 신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다. 그런데 550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다투는 틈을 타 금현성과 도살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대해 보복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이듬해 551년 신라와의 합동작전으로 소망하던 한강유역을 회복하고자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551년 백제의 주도로 치루어진 한강유역 전투에서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 6군을 빼앗고, 신라는 한강상류유역 10군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 전투 이후 얼마되지 않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밀약이 맺어졌으며, 이를 눈치챈 백제는 왜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553년 7월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한강하류유역을 탈취당한 백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의 珍城을 공격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553년 10월 백제는 신라에 왕녀를 보내 진흥왕의 소비로 삼게 했다. 진성전투에서 큰 패배를 입은 신라를 달래주는 한편 관산성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백제의 적극적인 외교수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진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제는 다시 관산성전투를 일으켰다. 1차전투에서 승리를 올린 백제는 신라의 복병에 의한 성왕의 돌연한 패사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553년 신라는 기습공격으로 백제의 한강하류유역 6군을 차지하였다. 이 기록은 너무 간략하여 전투의 주체를 알 수 없다. 신라의 한강유역점령의 의의에 비하여 의외이다. 『일본서기』의 이에 대한 기록은 백제가 스스로 한강유역을 포기한 듯이 되어있다.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이 두 개의 기록을 함께 볼 때 553년 신라는 백제의 큰 저항을 받지 않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듯하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빨리 백제가 한강유역에 대하여 통치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백제의 국내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백제는 한강유역을 회복하고자 하는 왕실․목씨․진씨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사씨․연씨 등의 세력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마 그러한 모습을 관산성전투에 반대하는 기로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점령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세력이 완강하여 새로이 점령한 땅에 대한 통치력 확보가 미적지근 할 때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외로 너무 쉽게 빼앗겨 버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백제의 권력대립은 성왕의 돌연한 사망으로 왕실의 일방적인 패배로 종결되었으며, 위덕왕은 정사암회의에서 대략 3년여만에 왕위 즉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