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전반 후엽 무렵부터 고유한 토기문화로서 영산강유역양식의 시원형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묘제에 있어서도 옹관묘와 토광(목관)묘가 혼재된 저분구묘가 출현한다. 이어서 4세기 중후반 경에는 옹관으로만 구성된 저분구묘가 나타나고 유공광구소호와 같은 영산강유역양식 토기의 핵심적 기종이 등장하면서 이 지역 문화의 독자성이 점차 짙어진다.
5세기 중엽 경 고분구 옹관묘가 출현하면서 영산강유역양식 토기문화가 완성되는데, 이는 영산강유역 세력이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였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산강유역양식 토기문화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개배는 그 기원이 백제이 있는 점등에서도 나타나듯 이 무렵 등장한 영산강유역 정치체 발달 이면에는 금강유역의 완충지대의 소멸로 인한 노령산맥을 경계로 한성백제와의 대외관계 설정의 필요성이라는 내적요인과 아울러 대고구려 연합체 구축을 위한 영산강유역 세력, 왜, 가야 등과의 관계 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백제라는 외적요인이 함께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475년 고구려에 의한 한성의 함락과 그에 따른 백제의 남천은 이러한 기존 국제관계 재편의 계기가 된다. 백제라는 영산강유역 정치통합의 힘의 중심이 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짐에 따라 반남 중심의 통합 구심력이 약화됨과 아울러 국력 회복을 위한 남방영역 확장이 절실한 백제의 입장에서도 이 지역 정치체의 영향력 약화가 바람직하게 때문이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나타나는 고고학적 산물들이 원분, 전방후원분 형태의 월송리형 횡혈식석실묘들이다. 종래의 정치적 중심인 반남을 제외한, 함평, 광주, 영암, 해남 등 외곽지역에만 보이는 분포정형과 함께 묘제나 부장품에서 백제, 왜, 가야 등의 요소가 혼합된 특징을 보이는 점,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웅진기 백제와 거의 일치되고 있는 점 등은 그러한 당시의 정세와 부합된다.
토기상에 있어 영산강유역양식의 해체, 묘제상에 있어 월송리형횡혈식석실의 등장과 더불어 진행된 반남 중심의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붕괴는 6세기 전반경 이 지역이 백제의 직접지배 영역으로 편제되면서 종결된다. 이 무렵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고고학자료가 바로 능산리형석실묘임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