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기의 중한관계는 여전히 책봉․조공이라는 예속관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분열과 정권 간의 대립으로 인하여 이는 형식에 불과했고 실제로 영향을 준 것은 국가 간의 역학 관계였다. 삼국시기에 요동의 공손씨는 한대 군국의 기초 위에서 한반도를 경영했고 요동과 조선을 차지하여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 공손씨의 세력 증대가 조위를 위협하자 조위는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과 조선을 점거했다. 이에 따라 조위의 통치력이 한반도로 들어가 현토․낙랑․대방군을 설치했다.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내부가 안정되자 중국의 관심은 점차 한반도에서 이동해가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로 말미암아 성장하여 하나의 강대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기에 전연의 모용씨는 요동에 자리잡고 고구려와 격렬한 충돌을 전개했다. 고구려가 모용씨에게 조공을 했지만 여전히 모용씨의 정발을 받았다. 그러한 주된 원인은 모용씨에게 화북으로 진군하여 중원을 장악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모용씨는 고구려를 철저히 제압하는 책략을 취하여 후환을 없애려 하였다. 모용씨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점차 쇠약해졌고 백제는 기회를 타고 흥기하여 북쪽으로 발전하여 평양성을 점거했다. 370년 전연이 멸망하고 요동이 비자 고구려 세력은 신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광개토왕 때 조선 지역의 패주가 되었다. 남북조 시기에 남북대치의 긴장형세는 다시 고구려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었다. 특히 북위는 북방의 유연과 남조정권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를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구려의 불법행위를 제지할 생각이 없었다. 고구려는 이 기회를 타고 한반도 남쪽으로 발전하여 백제, 신라 및 왜국을 침범하고 압박했다. 백제와 왜국은 중국 남북정권에 도움을 청한 것이 무효가 되자, 연합책략을 채택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요컨대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한 간에는 책봉과 조공의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책봉과 조공은 형식일 뿐이었고 진정으로 영향을 준 것은 역학관계에 대한 고려와 책략적인 요소였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