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시대 백제의 군사조직을 복원하기 위하여,구체적인 군사활동 사례를 분석하여 그 존재양태를 파악하고, 국왕 시위군과 중앙군 및 지방군으로 갈래를 지어 운용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논자들은 5명의 달솔에 의해 지휘되는 각 부 500명씩의 왕도 5부에 주둔했던 2,500명의 군사력을 상비된 백제의 중앙군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군사활동 사례를 분석하면 실제 전투와는 비교적 거리를 둔,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호종하는 시위군의 존재가 검출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왕도 5부에 주둔한 2,500명의 군사력을 단순한 중앙군의 아니라 국왕의 친위 군사력인 국왕 시위군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좌평이 아닌 5명의 달솔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 것도 국왕 시위군에 대한 귀족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상호 견제를 유발하여, 이에 대한 국왕의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들 2,500명에 달하는 국왕 시위군은 왕도 5부인가운데 효용자를 선발하여 충원하였으며, 이들은 국왕의 측근에서 호종과 궁성숙위의 기본 임무외에도 왕도의 치안확보와 최후 수비를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실제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백제의 중앙군은 약 10,000명 가량의 상비병으로서 왕도인과 왕도에 근접한 지방민 중 군역의무를 지고 있는 민들을 징발 편성한 존재였다. 이들은 평상시 왕도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위치에 있는 주위의 산성에 분산적으로 주둔하며 군사훈련을 받고 왕도 방어 기능을 행사하다가, 유사시에는 좌장이나 장군, 혹은 좌평․달솔의 관등자의 지휘하에 전장으로 출전했던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는 실전 부대였다.
백제의 지방군은 이미 밝혀진 바처럼 지방행정구획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다만 평상시와 전시 출전의 상황에서 그 군단상이 달라지는 군사조직이었던 점에 특징이 있었다. 평상시의 지방군의 방성에 주둔한 1,200~700명 규모의 상비군과 鎭城 및 변경 요충지의 鎭戊兵 및 內地의 郡을 단위로 한 城兵이 분산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지방군은 전시 출전의 상황에서는 방을 군관구로 결집되어 방군 혹은 방령군을 형성하였고, 방령이 최고 지휘권자가 되었으며, 군장은 군의 성병으로 구성된 소부대를 지휘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