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사 백제전에 전하는 구태시조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부여계 시조 동명을 계승한 실질적 건국시조로서 구태에 대한 관념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태는 고이왕에 비정되고 있다. 고이왕의 왕계, 기년, 관제 및 복색의 제정, 법령의 반포 등의 사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서술되고 있음은 고이왕에 대해 후대의 백제왕실이 특별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관념은 백제 정국이 반고구려적 성향을 띠고 대외관계가 복잡해져가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비유왕과 개로왕의 즉위과정에서는 왕계상의 혼란과 왕위계승 과정에서 정변이 개재되었을 가능성도 보인다. 특히 개로왕은 즉위초부터 왕권강화 작업을 추진하여 부여씨 중심으로 통치체제를 재편하였으며,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북위에 접근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에는 부여계승의식이 강조되며, 대고구려 악감정이 증폭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백제는 왕실의 권위와 자존의식을 고양시키고 실질적인 건국주로서 고이왕을 강조하게 되었을 것이며, 여러 가지 제도개혁 사실에 대한 溯及․府會도 차츰 이루어졌을 수 있다.
백제왕의 동명묘알현기사가 전지왕대를 끝으로 보이지 않음도 구태묘 건립 및 제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구태시조설에서도 동명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 동명설화에서 다시 구태시조설이 파생되었다면, 이 시기에는 현실적 시조로서 구태(고이)묘 祭享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결국 한성말의 왕실이 구태묘 제사를 행하였던 것은 왕실의 부여계승의식과 자존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에 이은 백제왕실에서 부여계승의식을 강조했음은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왕의 전사후 백제의 왕실은 잠시 흔들렸지만, 위덕왕은 즉위 14년을 기점으로 활발한 대중국외교를 재개하여 고구려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때 위덕왕은 보다 배타적 왕실가계의식을 강조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왕실의 조상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졌을 법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 보이는 ‘建邦의 神’이 백제 왕실의 조상신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구태(고이)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계 왕실이 개로왕대에 가계의 연결성을 추구했음을 생각할 때, 한성시대 말기의 왕실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도 계승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