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시대에 삶을 부지한 전투원포로들이 걸은 길은 크게 두가지 였다. 그 하나는 그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의 사노예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의 공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근초고왕 23년(368)의 경우를 끝으로 장수와 군사들에게 전투원포로를 지급한 예를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기록의 누락 탓인지, 실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전투원포로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단정지어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백제가 수행한 전쟁 가운데 그 진행사항이나 규모, 전과 등이 자세히 기록된 것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을 기록의 누락으로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시기부터 삼국 사이의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그 가운데 백제가 포로를 획득하거나 획득했을 가능성이 큰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요컨대 실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전투원포로들이 지급되지 않은 것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믿어진다. 이 입장에서 보면 4세기 후반 이후 전투원포로의 대다수는 공노예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당시 정치․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무관한 일일 수 없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근초고왕은 백제의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완성한 왕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통치기에 중앙과 지방통치조직의 정비가 일단락 되었으며,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도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었음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는 국왕의 아래에 있던 지배계급 즉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지방통치조직의 정비에 따라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그들의 중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이었던 읍락에 대한 지배력이 점차 약화되어갔을 것임은 거의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들이 새로운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토지와 그것을 경작할 노동력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여갔을 것이라는 점 또한 의심할 일이 못된다. 무령왕대에 귀족들의 토지집적을 억제하기 위하여 토지매매금령을 제정한 것은 당시 그들의 욕구가 얼마나 컸는지 반증한다. 이를 염두에 두면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당시 국왕들이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을 달가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4세기 후반 이후 전투원포로의 대다수가 공노예가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전투원포로 자체의 성격 변화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