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III.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과 재지분묘군과의 비교
IV.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 왜국의 전방후원분
V.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의 축조에 대하여
VI.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 왜국 주연지역의 전방후원분
VII. 맺음말
요약
필자는 지금까지 전방후원분으로 인식되어 온 영산강유역의 고분 13기 모두를 관찰했는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국, 특히 필자의 연구지역인 東北地方을 비롯한 주연지역의 전방후원분과 비교하여 양자간의 異同을 검토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13기에 대해 검토한 결과 확실한 전방후원분으로 인식된 10기는 왜국 전방후원분의 외형 모방 뿐만 아니라 장례와 관련된 일련의 행위가 집행된 장소로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5〜6세기의 왜국 전방후원분의 모습이 체계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는 왜계 요소가 부분적으로 재지묘제에 수용된 상황과는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또 분구에 대한 검토를 통해 10기의 전방후원분을 분정 평탄면의 有無에 따라 A, B라는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A그룹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특징을 지닌 일군으로 고분마다 개성이 있고 그 축조에 있어서 개별적인 분구, 석실 구축 등의 기술이 집약되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B그룹은 전방부 선단의 축조방식이나 연결부의 양상 등에 상당히 많은 공통성이 있기 때문에 B그룹의 고분들을 축조한 지역집단들 사이에는 전방후원분의 이미지 모델이 공유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그룹의 차이를 넘어 분구 구축방법이나 구릉에 대한 분구의 위치 결정 방식 등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 전체에 공통되는 특징도 간취할 수 있었다.
횡혈식석실에 대한 검토에서는 北部九州와의 비교를 통해 석실을 분류한 柳澤一男의 연구를 참고로 하면 직접관련형이 A그룹, 재지발전형이 B그룹의 고분들에 각각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분구에 대한 분류와 모순되지 않는다. 원통형토기에 대한 검토에서는 그 세 가지 계통 가운데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되는 圓筒埴輪系는 왜국의 하니와와 동일한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보았으나, 그 제작에는 재지적인 토기 제작기술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왜국과 같은 장례 체계를 재지 기술로 실현한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전단계의 재지묘제와는 단절된 존재이다.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재래묘제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바뀐 왜국 주연지역의 양상을 모델로 삼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그 변화의 원인으로서 본고에서는 사람의 이동에 의한 대규모 사회변동, 지역사회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는 집단의 출현, 재지사회의 정치적 판단이라는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여 검토하였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전방후원분 축조에 재지의 기술이 이용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재지사회의 큰 변동을 상정할 수는 없으며 재지집단의 선택으로 인해 전방후원분이라는 묘제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