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흥기에 관해서는 대방고지설과 하남위례성설의 두갈래가 있다. 4세기초 낙랑․대방군의 요서이동으로 이른바 「대방고지」의 토착세력들은 고구려세력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백제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과정에서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은 근초고왕 26년 고구려의 공격을 浿河상에서 물리쳤고, 이해 가을 평양을 공격,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 전사하게 된데서 시작된다. 패하를 사이에 둔 결전은 광개토왕 4년(395)에 있었다. 그 결과 백제는 대동강선을 포기하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패하를 사이에 두고 평양성 공방을 펼쳤다. 그렇다면 백제는 한강변의 하남위례성이 아닌 패하를 경계로 하는 「대방고지」에서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도성이 건설되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재령군(현 신원군)의 장수산성과 그 일대이다.
이곳은 원래는 한성이라 불렸으며, 왕도로서의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백제는 평양성 공격후 「移都漢山」하였다. 결국 낙랑․대방군이 물러간 313년부터 한산으로 도읍을 옮긴 371년까지, 약 60년간 백제의 도읍지는 바로 장수산성 일대였던 것이다. 이도한산은 한강 이남에서 강북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이는 오히려 장수산성 일대에서 한강 이남으로 남하한 것으로 파악된다.
강남의 풍납토성․몽촌토성과 석촌동 등의 대형 고분군과, 출토된 동진계 유물이 알려짐으로써 4세기 후반이 그 상한 연대로 자리매김 할 수밖에 없었다. 방단계제식 적석총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전환도 동진계 전실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교체연대의 획기도 이에 부합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찬자는 지리4, 백제조에서 근초고왕 26년의 평양성 공격 기사를 『남평양』으로 축소 해석하여, 장수산성 일대를 『남평양』으로 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역사상 큰 혼란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패하도 예성강으로 비정함으로써 이른바 대방고지는 송두리째 백제로부터 떼어 버려지고 말았다. 이는 남북한 사학자간에 공통된 기성 관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성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간 후에도 엄연히 고구려 삼경의 하나인 한성으로 기재되었을 뿐, 남평양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따라서 하남위례성을 충남 직산까지 내려보는 인식 자체도 백제의 정체를 왜곡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대방고지에 있던 한성을 이도함에 있어 『한』이란 이름까지 옮겨 감으로써 『아리수』를 한강으로, 『위례성』을 한성으로 개명하였다는 점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