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武王의 彌勒寺 창건
1. 창건 시기
2. 財源과 技術者 조달
III. 知命법사의 활동
1. 武王과 善化공주의 결혼과 知命법사
2. 彌勒寺 창건과 知命법사
IV. 知命법사의 위상
1. 彌勒신앙과 知命법사
2. 知命법사와 惠現
V. 맺음말
요약
미륵사지발굴조사보고서와 《삼국유사》 무왕조를 중심으로 미륵사 창건과 무왕대의 고승이었던 지명법사의 활동을 정리하였다.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의 완공 시기를 분명히 기록한 자료는 없지만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간지명 인각와를 통해 미륵사의 완공시기를 무왕 30년으로 볼 수 있다. 미륵사는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무왕은 국가적 차원에서 徭役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공방이나 기와요 등 생산시설을 설치하여 필요한 물건을 제작․조달하게 하였다.
또한 미륵사 창건에는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금광 개발을 추진하고, 일정한 지역으로부터 기부 또는 시주의 형태로 물자를 조달받기도 하였다.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하기 위하여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총책임자를 임명하여 책임을 맡기지 않았을까 한다. 이 공사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었고, 신라에서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 중 박사직이나 전문기술을 가진 자들은 부분별 책임을 맡았을 것이다.
무왕은 지기가 호걸스럽고 기량을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화하고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이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는 신라가 처한 국제적 상황도 작용하였지만 지명법사의 역할도 상당하였던 것 같다. 지명법사는 미륵사의 창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신통력으로 큰 못을 메웠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직접 토목의 일을 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무왕은 지명법사를 존경하고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지명법사는 무왕의 절대적 신임 하에 불교계 최고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누렸다. 이 시기에 지명법사에 필적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는 혜현이 있었다. 혜현 세력의 성장으로 지명법사와 혜현 사이에는 불교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일어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혜현은 어느 날 갑자기 達拏山의 골짜기로 숨어버렸다. 그가 산 속으로 숨게 된 표면상의 이유는 수행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면적으로는 불교계의 주도권을 두고 지명과 경쟁하다가 밀려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또한 당시 불교계 내에서 지명법사가 점하고 있는 확고한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