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史料 속의 任存城
3. 왜 부흥운동은 일어났는가
4. 任存城에서의 부흥운동
5. 부흥운동의 終焉과 任存城
6. 맺음말
요약
본고에서는 백제부흥운동 속에서 임존성이 지닌 역사적 역할을 살펴 보았다. 즉 부흥운동의 동기와 관련한 백제 의자왕의 항복이 지닌 성격을 위시하여 임존성과 연계된 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검토하였다.
임존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첫 봉화가 올려졌던 곳인 동시에 백제 부흥운동 최후 항전지였다. 또 전기 백제 부흥운동의 총본영이었다. 그러한 임존성이 마지막으로 함락됨에 따라 3년 이상을 지속했던 부흥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의 첫 봉화가 올려지던 순간 열흘만에 3만 명이 집결하여 勇躍 조국을 되찾는 항전의 대열에 서게 된 것이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義憤의 산물로서, 그러한 기개와 정신은 우리나라 의병운동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임존성 항전은 문헌에 전하는 것만 본다면, 첫 번째 전투는 660년 8월 26일의 신라군 공격을 격퇴한 것이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660년 8월 26일~9월 3일 사이에 소정방이 이끌거나 보낸 당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당군과의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부흥군은 일거에 200여 개 성을 회복하였다. 백제가 잃었던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임존성에서의 두 번째 승전이라고 하겠다. 663년 10월 21일~11월 4일에 걸친 세 번째 전투에서는 문무왕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의 공세를 격퇴시켰다. 마지막 네 번째 전투는 663년 11월 4일 이후 어느 때 있었는데, 흑치상지와 沙吒相如를 앞세운 당군의 공격으로 결국 임존성이 함락되었다. 그러고 보면 임존성은 최소한 3년 3개월 이상을 부흥운동의 거점으로서 국가 부흥의 임무가 존재했던 名과 實이 부합되는 성이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