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 검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백의 가계는 부여씨에서 분파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의 가계는 매우 몰락한 상태였던 것으로 파악되며 자신의 뛰어난 무공 등을 통해 官途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말기 대신라 전쟁과정에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제2관등인 달솔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출생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관도진출과 관련된 이야기, 부여 충화지역과의 관련성 등으로 볼 때 왕도와 가까운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로서는 백제시대 가림성에 포함되었던 충화지역에 비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둘째, 백제사상 계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황산벌 전투였다는 점에서 이 전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계백을 이해하기 위한 선결문제이다. 이 전투를 통해 볼 때 계백은 동방의 方領이었을 가능성과 그가 거느리고 출정한 5천 결사대는 일부 중앙군이 있었겠지만 대부분 동방 소속의 상비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셋째, 계백의 정치적 성격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한 성충과 유배의 몸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대비책을 제시한 좌평 흥수의 존재와 諂倖의 무리로 분류될 수 있는 忠常, 常永 등이 신라에 투항한 사실 등과 관련시켜 검토해 볼 때 계백은 오히려 성충, 흥수 등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계백은 출정 당시부터 대신라와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 달랐으며, 또한 죽음으로써 국가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는 계백이 달솔 상영을 비롯하여 당시 첨행의 무리로 분류되는 의자왕의 측근세력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백은 비록 의자왕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지라도 대신라전에 대한 인식과 황산벌 전투에서의 순절 등을 통해 볼 때 충신으로 불리고 있는 성충, 흥수 등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계백전이 입전되고 있는 『삼국사기』열전7에 대한 일반적 특징을 통해서도 계백의 정치적 성격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열전7은 모두 위국순절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계백의 순절은 신라인들에게조차 커다란 인상을 남겼으며, 백제인들에게는 계백과 관련하여 많은 설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였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