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명문의 내용검토
III. 백제유민의 동향
IV. 신라의 對백제 유민정책
V. 맺음말
요약
1960년대에 연기지방에서 발견된 7개의 불상 중 명문을 지닌 4개의 불상을 중심으로 명문해독과 불상조상을 주도한 知識, 香徒등을 구성한 사람들의 신분 및 활동과 백제유민의 부흥의지의 변화를 신라의 對百濟遺民政策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①․②번 불상명문에는 불상제작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의 인명과 관등이 적혀있다. 이들은 五十人知識과 250人香徒 등의 단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여러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五十人知識에 의하면 지방 토착세력이었다고 생각되는 全氏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방관은 백제의 지방 통치조직인 방․군 단위를 기본으로 하여 몇 개의 집단으로 구분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사비성 함락 이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지방 토착세력들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백제부흥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의 백제 부흥운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는 없지만 이들이 불교의 신앙단체인 知識과 香徒를 중심으로 백제부흥의 열망을 나타내주는 불상을 조성하였던 이유를 바로 이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었던 연기지방의 백제유민들은 이제 신라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힘은 없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무너져버린 백제가 아미타불의 힘을 빌어 극락정토에서 나마 새롭게 부흥할 수 있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불상들을 조상하였다. 차츰 행정적으로 나마 지방 통치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한 신라는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676년 이후에는 백제유민을 분산시키기 위한 사민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연기지방에서 조직되었던 知識과 香徒같은 단체들은 그 이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676년 이후인 文武王 18년과 신문왕 9년에 만들어진 ③․④번의 불상명문에서는 知識과 香徒같은 단체를 찾아볼 수 가 없다. 뿐만 아니라, ③․④번 불상조상의 발원대상에서는 백제부흥의 상징적인 요소인 國王大臣의 존재가 제외되어 있었으며, 그 발원대상도 가족적인 규모로 축소되어 있었다. 이점은 신라의 사민책의 실시로 인하여 백제유민들의 백제 부흥의식마저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