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序論
II. 阿莘王의 볼모외교
III. 親百濟 세력으로서의 倭軍의 韓半島 戰鬪
1. 己亥年과 更子年의 倭
2. 甲辰年과 丁未年의 倭
IV. 結論
요약
近肖古王의 평양성 공격(371년)에 의해, 故國原王의 戰死로 발단된 4세기말 5세기 초 高句麗의 百濟 공격은 近仇首王과 辰斯王代에는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阿莘王보다 1년 앞서 즉위한 廣開土王에 이르러 백제의 위기적 상황은 고조되었다. 특히 永樂 6년의 백제침공으로 백제는 58城과 700개의 촌락을 탈취 당하고 王弟와 대신 열사람이 볼모로 잡혀가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아신왕은 倭에 太子인 腆支를 볼모로 부터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고구려의 實聖과 卜好를 볼모로 한 외교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게 되어 고구려 신라의 연합전선이 형성되게 된다. 倭는 腆支가 渡倭한 1년 뒤부터 한반도에 나타나 신라를 치고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는 데, 이는 모두 백제의 사주에 의한 결과로 본다. 그동안 일본학계에서는 이 광개토왕 비문에 나타난 倭軍의 활동은 『日本書紀』에 기록된 任那日本府를 비롯한 황당한 한반도 관계기사와 『宋書』에 보이는 倭5王기사를 연결하여 倭의 한반도 경영을 증거 하는 사료로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倭軍의 한반도 출병은 신라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같이 百濟의 외교력에 의한 실익 없는 출병으로 파악된다. 고구려와 싸우는 왜군의 뒤에는 비문 어느 곳에서나 백제가 있었다. 고구려의 남진에서 주공격 목표는 항상 백제였다. 결국 倭는 백제의 볼모를 통한 고도의 외교전술에 의하여 한반도에 출병하여 百濟의 최전선에서 高句麗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백제와 더불어 완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