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汶’과 ‘帶沙’가 낙동강유역에 비정된다면 『繼體紀』에 백제가 ‘己汶’․‘帶沙’를 둘러싸고 ‘伴跛’와 다투는 이야기는 백제가 북쪽에서 가야로 진출하려는데 대해서 성주의 ‘本彼’가 반발하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백제는 이미 369년의 가야 7국 평정 등 북쪽에서 가야를 공략한 사실이 있었다. 따라서 ‘己汶’․‘帶沙’를 둘러싼 분쟁은 백제가 최초로 가야지역에 진출하는 내용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지던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의 일환에 지나지 않은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己汶’․‘帶沙’를 둘러싼 백제와 伴跛의 대립은 369년 이래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6세기 가야지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서 백제가 가야지역에 ‘郡領’․‘城主’등의 지방장관을 배치한 것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면 6세기 초 백제가 진출하기 이전까지 왜가 가야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任那日本府說이나 變形된 任那日本府說 그리고 加耶의 독자적인 발전說 등은 당연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己汶’․‘帶沙’를 둘러싼 분쟁이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첫 진출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己汶’․‘帶沙’가 낙동강유역이라면 倭가 任那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거나, 加耶가 독자적인 발전을 했다고 하는 세력범위가 축소되어야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