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세력의 추이를 중심으로 영서지역 토착세력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三國史記』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세력은 東濊=僞靺鞨의 한 갈래 집단이 아니라 각기 영동과 영서지방에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동예가 아니라 영서지방에 거주하던 토착집단이락 할 수 있다. 영서 말갈은 다시 세분하면 남한강유역과 북한강유역의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연맹왕국단계로 진입하지는 못하였으나 中國郡縣과 연대하여 백제를 빈번히 침입하였다. 둘째, 중국군현의 축출과 백제의 성장에 따라 영서 말갈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백제는 북한강유역의 말갈, 즉 貊國의 토착세력을 거의 해체하지 않고 그 수장 층을 이용한 간접지배를 실시하였다. 반면에 남한강유역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백제계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지배력이 상당할 정도로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산간오지에 위치하여 경제적인 가치가 빈약한 북한강유역보다는 남한강유역의 경영에 집중하였고, 이에 맞서 남한강유역의 일부 세력들이 거주지를 벗어나 신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남진경략이 본격화되면서 영서 말갈에 대한 지배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이전 되었다. 고구려는 영서 말갈의 토착수장 층을 이용하여 백제 공격을 위한 군대 징발과 공납의 징수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배정책은 군현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말갈의 수장 층을 그 官等體系에 편입하여 관직을 除授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는 고구려 內地의 지방통치와는 달리 변방지역을 간접 지배하는 한계를 내포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이원적 지배구조의 약점을 이용하여 비교적 쉽게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신라는 이 과정에서 말갈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토착세력의 수장 층을 이용하던 고구려와 백제의 간접지배와는 달리 지방관을 파견하고, 內地化를 추진하는 등 직접지배를 지향하였다. 또한 신라는 중원지방에 중원소경을 설치하여 가야인과 內地人을 徙民하는등 영서 말갈의 토착기반을 해체하고 새로운 지배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영서 말갈의 토착질서는 해체되고 신라의 州郡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