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중국 史書에서 전하는 유력귀족자층인 大姓八族이 있었는데, 이들은 백제내의 유력한 귀족세력 집단일 뿐이지, 정치적 지향성이 같다거나, 中國에 대한 인식 등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반왕적 세력을 형성하여 왕과 대립한 세력도 있었던 반면, 친왕세력을 형성하여 그 세력을 백제말기까지 존속한 세력도 있었다. 이들이 재편되기 시작한 시기는 무왕대로, 이는 무왕대의 왕권강화 과정을 뒷받침하였던 세력구성에서 알 수 있었다. 무왕은 이러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불교․유교 등 사상정책과 對新羅戰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무왕말기에는 ‘大王意識’이 사회전반에 걸쳐 확립되었을 정도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무왕대의 이러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즉위한 의자왕은 무왕대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자신만의 세력기반을 형성하고자 642년 친위정변을 단행하였다. 이 정변 후 백제사회 내에 경직된 국면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와 한반도 남부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신라침공이 행하여졌다. 그리고 정치를 직계중심으로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太子冊封이 조기에 이루어졌다. 의자왕은 정변단행 후 새로운 세력군을 좌평직에 등용하였다. 이들은 종래 유력 귀족자층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세력들로서 의자왕대 좌평직의 약 70%를 담당하여 의자왕이 전제왕권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자왕은 초기시기인 4년까지는 親唐路線을 추구하며, 대신라전에 대한 당의 암묵적 후원을 기대하였으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당의 개입으로 인해 좌절되자 고구려와의 관계를 더욱 개선시켜 왕 15년에는 고구려와 연계하여 신라의 北界 30여 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百濟와 高句麗와의 연계는 신라와 당과의 연합을 초래하여 7세기 한반도에서의 국제전을 야기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羅․唐 연합이라는 외세 앞에서 정치의 주도권 문제로 대립만을 일삼았던 이들은 외압의 여파를 감당해 내지 못하였으며, 결국 10여 일을 견디지 못한 채 泗沘城이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군사력이 약해서였다기 보다는, 지배층들이 국가적 존망 앞에서 정치적 결집을 이끌어 내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전술적 대립상황과 7세기 동아시아 정세에서 국제전이라는 분위기를 감지해내지 못한 지배층의 판단착오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