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의 가야 진출
1. 현종기 3년 시세조 기사의 의미
2. 己汶․帶沙의 병합과정
III. 백제의 安羅진출
1. '安羅會議'의 성격
2. '任那復建會議'와 군령․성주
3. 군령․성주와 '甲背'
IV. 맺음말
요약
6세기 전반에 진행된 백제의 가야진출과정은 크게 가라와 안라에 대한 진출로 나눌 수 있다. 가라 진출은 섬진강유역의 ‘임나 4현’의 할양과 기문․대사의 병합과정을 통해서 살필 수 있는데, 현종기 3년 시세조 기사에 보이는 ‘대산성 전투’는 그 단초로서 가라국의 성장(가라연맹)과 백제의 대웅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 ‘기생반숙녜’는 백제인으로서 가야와 관련하여 모종의 역할을 하다가 왜로 망명한 ‘목씨’세력을 상징화한 인물이다. 백제의 침공에 위기를 느낀 가라연맹은 내적으로는 축성과 가야금 음곡을 통해 가야제국의 결속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대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 530년 전후해서는 결국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백제의 안라 진출은 사비 천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기문․대사 병합 직후부터 백제는 안라 진출을 모색하지만, ‘안라회의’와 신라의 탁순 병합과정에서 소외되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흠명대 들어 재개된 백제의 안라 진출은 ‘임나복건회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는 이 회의에서 안라의 친신라경향을 비난하는 한편 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백제는 전대에 이미 병합한 기문․대사 지역에 방-군-성 체제에 의한 새로운 지방관인 군령․성주를 파견하는 등 영역화를 꾀하고, 안라에도 이들을 배치하고자 하였다. 결국 540년대 후반 안라는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신라와 왜의 외교자세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군령․성주는 성격상 ‘갑배’와 관련이 깊고, 백제는 ‘성방갑배’를 비롯한 좌평․달솔급의 최고위층을 파견하는 등 군사․외교상으로 가야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백제의 2차 남하는 근초고왕대의 1차 남하 때와는 달리 직접적이었고, 영역화의 의지가 보이는 등 보다 지배적인 성격이 강하다. 새로 편입된 가야지역에 무작정 성격을 가진 지방관을 파견하고, 묘제 등 백제 문물의 전수를 통해 가야 고유의 문화를 해체시키고 있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제는 가라와 안라를 영향력 아래에 두는데 성공함으로서, 한강고토회복(551)에 앞서 마침내 그토록 염원했던 남부지역을 배후로 한 세력의 결집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