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오늘날 對馬島가 日本에 속해 있으나, 7세기 말경까지는 韓國의 屬島였음을 말한 바 있다. 즉, 日本 史家들이 그들의 식민지적 영역으로서, 南韓에 있었다고 하는 任那는 對馬島에 있었는데, 이는 6세기 중엽에 멸망하고, 『日本書紀』朝貢 기사에 나타나는 新羅․百濟․高麗는 韓半島 三國의 分國 혹은 屬郡으로서 對馬島에 있었던 邑落名인데, 이는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에 멸망한 것이라 하였다. 즉, 百濟와 高麗는 그의 본국인 韓半島의 百濟와 高句麗가 망하자, 따라서 멸망하고, 新羅도 慶州 新羅의 초기에 對馬 上島의 佐須奈(사수나)의 시라에(地名)에서 일어나서 佐護에 머물다가, 南下해 雞知의 任那를 멸하였으나, 倭의 두 번의 공격을 받고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에 멸망했다고 하였다. 이 論考에서는 『日本書紀』,『桓檀古記』의 기록과 對馬島의 遺跡과 地名을 근거로 하여, 이 섬에 百濟郡이 있었음을 살펴보고, 또 이 섬에 있었던 任那國도 百濟人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고찰하였다. 또한 雞知에 있었던 百濟郡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였다. 百濟郡의 첫째 역할은, 韓半島의 百濟人이 倭에 건너가는 징검돌 혹은 中繼地로서의 구실이었다. 對馬島 百濟의 두 번째의 역할은, 이 섬에 있었던 新羅․高麗(高句麗)․任那․加羅 등 여러 邑落國과의 교섭 내지 유대로 自國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對馬島의 百濟는 加羅․安羅와 連帶하여 北의 新羅를 막으려 했다. 또, 百濟는 新羅의 위협 속에서도 新羅․高麗․任那와 함께 倭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對馬島의 百濟는 A.D. 600년, 韓半島의 百濟가 羅唐 聯合軍에 의해 멸망하자, 따라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