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周王의 시해사건과 이른바 解仇의 반란에 관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기록은 《三國史記》에 보이는 것들이 거의 유일하다. 《三國史記》편찬자는 일관되게 熊津遷都초기에 있었던 그러한 정치적 변동의 주동자가 解仇였다는 입장에서 당시의 정국을 파악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解仇의 입장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그 정치적 변동의 승리자인 眞氏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기가 힘들다. 解仇가 文周王을 시해한 배후인물로 낙인찍히고, 아울러 그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한 제기가 된 것은 三斤王 2년에 있었던 眞氏의 정변이었다. 이 점에서 이 시기 정치적 변동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이제까지의 이해와 달리, 文周王 시해사건과 이른바 解仇의 반란이 아니라 바로 眞氏의 정변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웅진천도 초기에 있었던 일련의 정치적 변동을 주도한 핵심세력이 解仇가 아니라 眞氏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三國史記》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이 점이 바로 많은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려온 것이다. 한편, 웅진천도 초기의 정치적 변동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도 文周王에서 三斤王에 이르는 시기에 정치권력을 오로지하던 解仇의 몰락일 것이다. 이에 따라 解氏세력도 크게 약화되었을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解仇의 專權은 이들 신진귀족들에게도 매우 불만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지속적인 정치적 성장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진귀족들이 眞氏의 정변에 가담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解仇의 몰락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이 왕비족과 같은 특정한 一族과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특정한 一族이 왕실과 어깨를 겨루는 일도 더 이상 없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한성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어온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에 신진귀족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유력귀족이 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배경의 한편에 이들이 이제 眞氏를 비롯한 어느 一族의 정치적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文周王~三斤王대의 정치적 변동 직후에 東城王이 왕위에 올라 구귀족과 신진귀족을 골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專制君主로서의 면모를 갖추게된 것도 실로 그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고 믿어진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