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文周王의 즉위와 解仇의 권력 장악
III. 昆支의 귀국과 解仇에 대한 견제
IV. 解氏 세력의 제거와 昆支系의 등장
V. 맺음말
요약
해구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으로는 문주왕의 즉위를 도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해씨는 또한 목협만치와 함께 웅진 천도를 주도함으로써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천도 이후 해구가 자리잡은 대두성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는 요충지였다는 점과 병관좌평직을 제수받은 것은 바로 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주왕은 점차 해구가 왕권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자 왜에 있던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해구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곤지는 귀국하여 반해구 세력을 결집시킨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곤지 또한 문주왕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그를 상좌평이 아닌 내신좌평에 임명한 점과 이와 동시에 삼근을 태자로 임명한 점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곤지의 죽음은 반해구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것에 의혹을 품은 반발로 일어난 피살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곤지의 죽음에 이어 문주왕이 시해된 것은 바로 곤지의 활동이 권력투쟁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문주왕의 시해 또한 반해구 세력과의 접촉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구는 문주왕이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시해할 만한 요인이 없었다. 그런데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 시해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문주왕의 활동에 큰 위협을 느낀 해구가 비상 수단을 택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반해구 세력이 이미 해구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장악한 해구가 불과 3-4개월 후에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반해구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해씨 세력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에 곤지계의 적자인 동성왕은 삼근왕 사망 이전에 귀국하여, 해씨에 대한 사민을 추진하고 삼근왕 추종 세력을 제거한 후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에서 해구의 반란은 곤지계를 중심으로 한 반해구 세력들의 정권 장악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통해 곤지계가 전면적으로 왕위 계승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의미를 둘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