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4세기 百濟의 국내외적 상황 변화
1. 국제 정세의 영향과 백제의 대외교류 통제
2. 比流王系의 등장과 남방 진출의지
Ⅲ. 近肖古王의 남방 정벌과정
Ⅳ. 백제주도의 대외 교류체계 형성 시도와 한계
1. 고구려의 대응과 전라도 지역의 상황
2. 백제의 가야진출과 신라의 대응
3. 백제와 왜의 교류 - 왜의 남방정벌 참여 이유
Ⅴ. 결론
요약
서기 4세기에는 중국 대륙에 ‘5호 16국’ 시대가 대두함에 따라 한반도에도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의 수립이 필요하였다. 그 중 백제에서는 정치적으로 責稽一汾西王이 중국 세력과 대립하다가 연이어 죽게 되자, 이에 대한 反動으로 ‘臣民’의 추대 아래 비류왕의 정변(304)이 일어났다. 이렇게 성립된 비류왕권이지만 여전히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와 직접 대립하게 되고, 내부적으로는 즉위를 지지하였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왕권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比流王은 왕권 강화에 필요한 在地 基盤 錦江 이남의 남방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고, 이것은 근초고왕의 등장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백제는 근초고왕의 등장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필요한 ‘국가적 기반’을 계속 확충하고 대외적으로는 백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경제적 국제교역권을 형성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근초고왕대의 정벌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백제가 남방 지역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정벌이 있었던 그해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와의 첨예한 대립은 남방에 대한 백제의 통제력을 상당 부분 약화시켰고,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阿莘王 6년에는 전라도 일대의 세력들이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후에도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 독자적으로 대외교섭을 진행한 흔적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볼 때, 백제에게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압력과 통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낙동강 일대의 가야지역은 近仇首王 시기까지도 백제가 군사력을 사용하는 등 효과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바로 신라의 반발을 불러왔다. 백제가 가야를 완전히 장악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교역권의 장악으로만 그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을 끌어들이고, 그 결과 백제는 5세기에 들어서 낙동강 일대의 교역 체계를 상당 부분 훼손당하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