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言
Ⅰ. 馬韓과 百濟 그리고 龍仁地方
Ⅱ. 百濟 五部制와 龍仁地方
Ⅲ. A.D. 4C 중반 이후 百濟 地方統制 强化와 龍仁地方
Ⅳ. 漢城百濟期 龍仁地方 住民들의 삶의 片鱗
Ⅴ. 高句麗 支配權下의 龍仁地方
結語
요약
제 Ⅰ장에서 필자는 먼저 북부마한제국 가운데서 서울 강남 지역과 하남시 일대를 伯濟國으로, 爰襄國․牟水國․桑外國․臣濆活國은 임진강 및 한탄강 유역 일대로, 古離國․怒藍國을 남한강 유역 일대로 비정하고, 용인 및 수원․화성 지방에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군장사회는 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 가운데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용인 지방이 국가형성기 백제의 급격한 국제 팽창 추세 하 일찍부터 그 세력권 안으로 흡수․통합되어 지방통치 체계 내의 한 행정단위로서 그 정치적 존재 양식이 정위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제 Ⅱ장에서 필자는 백제 오부제 하의 북부는 한강 이북지역, 동부는 남한강유역일대, 남부는 미호천유역일대로 비정하면서, 서부가 용인․수원․화성 일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 당시 용인의 중심지가 구성읍․기흥읍․수지읍 일원에 자리했었음을 추론하였다.
제Ⅲ장에서는 백제 국가의 용인 지방에 대한 통제 및 지배역량은 특히 A.D. 4C 후반 이래 극대화되어 나갔으며, 이 점을 고고자료들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또 필자는 이런 사실이 A.D. 4C 후반~5C 전반 점증되는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비례하여 고조되던 군사화경향의 추세와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제Ⅳ장에서 필자는 고고자료들을 바탕으로 당시 서루 맞물리면서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용인 지방 주민들의 개별가족 자율성 제고의 수준과 한전농법에 바탕한 소농경영양식의 진전상을 어설프게나마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백제 국가권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약조건들로 인하여 이 지방 주민들의 삶 또한 상대적으로 고단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Ⅴ장에서 필자는 고구려가 A.D. 475년 漢城强襲 이래 용인 지방에 설치했다는 ‘구성현’은 거점지배적 성격이 강한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 지방 지배의 실상에 비추어 볼 때, 그 말의 참된 의미에 있어 군현제 하의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아니라, 종래 이 지방의 중심지였던 구성읍․기흥읍․수지읍 일대에 자기들의 군사적 거점을 설치했던 것을 뜻한다고 새겼다. (필자 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