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관련사료 검토
Ⅲ. 4세기 ‘遼西’와 ‘遼東’ 일대의 정세
Ⅳ. 중국내 扶餘系 人物의 동향
Ⅴ. 맺음말
요약
제 1장에서 백제의 요서진출을 기술한 1차 사료를 분석한 결과 백제의 요서진출과 관련된 ‘모종의 사료’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까지 전해지고 있었고, 각 사서의 찬자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기술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백제 요서진출의 상하한은 372년~405년, 진출지역인 ‘遼西’는 濼河 중하류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요동진출과 백제 요서진출이 거의 동시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사실도 확인하였다. 제 2장에서는 중국대륙의 혼란기를 틈타 과연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였는지 가늠하기 위해 4세기 요서와 요동일대의 동향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4세기 전반 정세가 급변하였지만, 고구려와 백제 모두 ‘略有遼東’과 ‘略有遼西’를 실현하지 못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는 385년과 400~402년 두 차례 ‘略有遼東’을 실현하였지만, 백제가 그에 상응하여 ‘略有遼西’를 실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 요서진출설은 杜撰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만 南朝史家들이 종전 사서를 통해 주변국의 역사를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모종의 사료적 근거’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하였다. 이에 제3장에서 385년 6월 고구려의 요동진출 직후 令支에 雄據한 餘巖을 주목하였다. 餘巖의 令支 진출 시기와 지역 등은 백제의 요서진출 기사와 부합하였다. 더욱이 고구려 요동진출과 餘巖의 令支雄據은 연이어 기술되어 있다. 이로 인해 南朝史家들은 餘巖의 성씨와 백제인의 성씨가 동일한 것을 혼동하여 餘巖을 백제 장군으로 착각하고, 그의 令支雄據를 ‘백제의 요서진출’로 기술하였다고 보았다. 南朝史家들의 역사인식방식 때문에 부여계 인물은 餘巖의 활동이 백제의 요서진출로 둔갑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백제 요서진출설의 실체는 4세기 후반 중국내 부여계 인물의 활동이다. 비록 4세기 후반 중국내 부여계 인물의 활동이 南朝史家의 독특한 역사인식방법 때문에 백제의 요서진출설로 둔갑하였지만, 이들의 활동도 한국고대사의 일환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4~5세기 부여를 비롯한 삼국의 동향은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와 맞물리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