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위의 예맥 토벌과 한
III. 신분고국과 〈백제본기〉의 말갈
IV. 진왕과 신지의 우호
V. 맺음말
요약
마한의 통합은 비록 백제에 의해 완수되지만, 그 통합의 최초 움직임은 목지국의 辰王에서 비롯되었다. 《三國志》 韓轉은 바로 그 진왕의 역사이다. 결국 편년에 문제가 있을 뿐, 《삼국사기》도 《삼국지》 한전과 서로 상반된 역사상을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삼국지》 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서로 보완적으로 활용하여 진왕 이해에 한 발짝 더 다가서려 하였다. 245년 魏의 濊貊토벌은 단순히 田丘儉의 고구려 침공을 후원한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中國 郡縣의 韓에 대한 통제는 예맥 지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B.C. 75년 이후 領西濊 지역은 樂浪郡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낙랑군은 辰韓과 직접 교통하였고, 이 길은 적어도 125년까지는 유지되었다. 낙랑군과 진한 사이의 이 교통로는 韓 사회의 통합을 가로막는 분열의 길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한 중부지역에서는 目支國이 신분고국에 밀려 내려온 伯濟國을 받아들이고, 辰·弁韓 12국을 臣屬시키는 등 급속히 권력을 확대하여 갔다. 마한 남부의 臣雲濟國과 변한의 安邪國 등도 서로 교통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목지국은 海路 및 陸路등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를 세력권으로 장악함으로써, 삼한의 대국인 신운신국, 안야국, 신분고국, 구야국 등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진왕이 이들 4국의 臣智에게 내린 優呼를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辰王은 目支國의 臣智가 이러한 교통로를 매개하는 가운데 韓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교통로에 기초하여 진왕의 권력이 탄생하였지만, 이 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중국 군현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왕의 존립은 중국 군현의 向背에 맡겨진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중국이 수여한 官 체계를 그대로 자신의 官으로 사용한 점도 진왕 권력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3세기 중반 진왕 권력의 도달점은 중국의 분열책을 막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幘溝漊 이전 단계이며, 또 臣智들의 원심력을 일정하게 통제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夫餘의 四出道 이전 단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