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기리영 전투에 대한 재검토
III. 위의 한군현 개입과 기리영 전투
IV. 대방군의 활로 모색과 백제의 성장
V. 맺음말
요약
필자는 기리영전투를 위의 對韓政策과 백제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에 따르면 위가 韓 세력에 개입한 것은 일련의 동방정책과 관련이 있지만, 韓 세력이 배후의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양자가 타협을 하게 되고, 이를 주도한 백제는 실질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한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결정적계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이었다. 제2장에서는 기리영전투에 대한 쟁점사항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기리영전투는 대상국의 吳記와 吳譯일 가능성을 제기한 견해도 있지만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신지를 기리영 주체세력으로 볼 경우 목지국 진왕설과 신분활국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목지국설은 진왕이 현실적으로 마한을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점과 위치가 멀리 떨어졌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졌다. 신분활국설 또한 애초에 주목하게 된 배경이 목지국 진왕과의 관련 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를 분리해야 그 실체에 접근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신분활국설은 당시 경기 북부 지역에서 우월성이 입증된 백제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해야 될 문제라고 보았다. 끝으로 제4장에서는 기리영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까지는 기리영전투를 韓세력의 패배로만 보았기 때문에, 이 시점에 쇠퇴한 것으로 보이는 목지국이나 신분활국을 주체세력으로 상정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위가 韓을 멸망시켰다는 기사는 위 측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으로, 실제 마한이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의 과장은 확인된다. 더욱이 위가 원래 韓에 개입한 의도는 배후세력의 안정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이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이들과 전면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위가 소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자, 2군은 각기 활로를 모색하였다. 먼저 낙랑군은 지배세력이 오랜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존립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대방군은 지배 세력의 기반이 약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는 방향에서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대방과 백제와의 결합은 부종사 오림이 우려한 것으로, 관할권을 변경한 의도가 대방군에 대한 견제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양자의 결합으로 대방군은 백제의 구원을 받은 반면 백제 또한 대방군의 권위를 이용해 주변을 평정해 나가는데 유리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를 고려하면 漢군현의 한반도 축출 이후 대방 세력이 백제에 많이 귀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은 알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