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武王의 즉위와 阿莫城 전투
III. 北方 領域에 대한 회복 노력
IV. 東南方에 대한 進出과 옛 加耶 지역의 收復
V. 결론
요약
본고는 백제 무왕대의 등장과 왕권 강화 과정에 대외 전투를 통한 영역 확대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무왕은 위덕왕 이후 왕위 계승 문제까지 관여한 귀족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다. 따라서 무왕의 정치적 토대가 대단히 취약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재위 3년의 아막성(=모산성) 전투를 계기로 서서히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본기〉의 무왕대 기록 중 첫 번째로 나타난다. 그리고 무왕은 몰락한 왕족 출신으로지지 기반이 전혀 없이 귀족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아막성 전투는 무왕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위덕왕(554~598) 이후 백제 정국을 주도하던 귀족들에 의해 전투가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 군사 4만이 죽을 정도로 대패하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백제 사회의 인적, 물적 손실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을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패전에 따른 책임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왕은 이를 계기로 전쟁을 주도한 귀족 세력들을 후퇴시키고 친왕 세력을 등장시켜 왕권을 안정․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내정을 정비․강화한 후 북으로는 무왕 12년(611)에 가잠성(안성)을, 무왕24년에 勒弩縣(괴산)등 경기도와 충청북도 일대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로 이어지는 신라의 대중국교통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성왕 때에 잃어버린 백제의 북방 영역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진행하였다.
또 동으로 무왕 17년(616)에 모산성(=아막성:운봉)을 함락시키고, 무왕 25년(624)에는 속함(함양),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남강 유역 일대를 아우르며 진주 지역까지 진출한 듯 하며, 다시 낙동강 중류의 경상북도 남부 지역에 대한 공격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무왕 37년(636)에는 신라 왕도인 경주에 대한 기습 공격까지 시도하였다. 따라서 무왕 때의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위축되던 모습에서 탈피하여 군사적인 적극성으로 신라를 압박해 갔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