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蓋鹵王代 고구려의 침공과 漢城의 상황
Ⅲ. 文周王의 熊津 遷都 배경
Ⅳ. 東城․武寧王代의 漢山城․漢城 기록 검토
Ⅴ. 東城․武寧王代의 북방 영역
Ⅵ. 결론
요약
백제가 熊津으로 遷都한 이후 北方의 領域이 어떻게 變化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서기 475년에 있은 高句麗 長壽王의 侵攻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首都인 漢城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다시 東城王(479~500)․武寧王(501~522) 연간에 나타나는 漢山城․漢城기록들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종래 이 기사들은 완전히 잘못된 기록이라거나 비록 인정하더라도 地名移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東城王과 武寧王代의 대외관계 특히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있다. 따라서 완전히 무시하거나 설혹 인정한다 하더라도 地名移動이란 입장에서 충청도에서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있는 그대로 한강 유역에서 지명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 본다.
이는 漢山城․漢城 기록 이외에도 당시 백제가 고구려와 접전을 벌인 地名 기록들의 대개가 漢江유역 일대와 관련이 있는 것에서 또다시 확인된다. 즉 당시 백제는 水谷城(신계), 馬首城(김화), 牛頭城(춘천), 沙峴城(춘천과 홍천 사이), 雉壤城(원주), 高木城(연천), 長嶺城, 漢城, 橫岳(북한산)등에서 고구려와 대소 접전 및 접촉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남진 거점은 충북 청주(중원)에 있었으므로 薩水(달천)나 雉壤城(원주), 加弗城(옥천 근방), 圓山城(금산진산면) 등 충청도와 강원도 남부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신라까지 뛰어든 삼국 공방전이 전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한강 유역을 넘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백제의 세력 신장으로 고구려 남부 국경선이 위협받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중부 내륙의 충주를 거점으로 고구려가 백제를 측면에서 공격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이나 기록으로 보건대 웅진시대 특히 東城․武寧王때의 백제는 북으로 황해도 신계 지방에서 동으로 경기도 연천 및 강원도 김화, 춘천, 원주를 연결하는 한강 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事蹟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武寧王에게는 군사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는‘武寧’이라는 시호가 명명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梁書 百濟傳에 기록된 것처럼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彊國)”고 인정받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