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황룡사에 대한 연기설화는 황룡사 경영의 시말을 잘 전해 주고 있으며 이같은 사실은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더욱 주목을 끈다. 황룡사 경영은 신라가 불교를 사회적으로 수용함에 있어 필연적인 결과였다. 청간가람은 황룡의 출현을 그 계기로 하지만 이는 왕실불교를 중심으로 한 가람의 조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중건가람은 장육존불의 조성 또는 구층탑을 세워 구한을 항복받는다는 기록이 중건가람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는 왕실과 귀족집단, 지방 호족까지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에까지 불교를 파급하는 과정에서 조영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이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로부터 교시를 받았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 신라사회가 필요로하는 불교는 화엄사상임을 일러준다. 자장이 체득하고 돌아와 신라의 사회사상으로 삼으려 하였음이 구층탑을 세워 중건가람으로서의 황룡사를 완성하고 국통이 되어 내외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이같은 불교는 모든 계층에 전파되고 사회적 통합을 가져오는 공헌을 하게 된다.
황룡사나 미륵사가 경영되기 전 신라, 백제에 사회적으로 수용된 불교는 미륵사상이었다. 백제는 상생신앙위주의 미륵사상을 하생신앙위주의 미륵사상으로 전개시켜 불교를 보다 하층계급으로 확대 보급시켰다. 신라는 미륵하생신앙은 왕실측근에서 유행하고 상생신앙은 귀족집단에 유행하였는데 왕실이 중심이 되어 미륵하생신앙 위주의 불교를 화엄사상으로 전개시켜 폭넓은 계급을 총확하며 전제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불교사상의 사회적 전개의 상이는 문화의식의 상이에 기인한 것으로 신라는 전통적 보수적인데 반해 백제는 선진적 진보적이다.
백제는 신라 황룡사 구층탑 건립에 있어 신라가 백제공인을 청해오지 않음 안될 정도로 선진기술을 지녔으며 일찍이 유행한 미륵사상도 백제가 신라에 전해주는 선진성을 보인다. 미륵상생신앙 위주의 불교를 하생신앙화해 나간것도 문화의식의 선진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미구에 닥칠 미륵의 하생지가 백제라 믿게 됨은 선진적 진보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으며 미륵사 경영도 이같은 백제인의 선진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미륵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황룡사의 유물과 비교해 보지 못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