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와 백제의 접촉
Ⅲ. 광개토왕대 전반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Ⅳ. 광개토왕대 후반기 고구려의 對백제 공략
Ⅴ. 맺는 말
요약
광개토대왕대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 중엽이후부터이다. 이전에는 낙랑과 대방이라는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간의 본격적인 충돌은 고구려 고국원왕․백제 근초고왕대에 들어와서 이다. 이 시기는 양국이 예성강을 경계로 일진일퇴하는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광개토왕 시대가 열리면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동북아의 정세는 고구려가 주도했고, 남쪽에서의 정세도 변화가 있었다. 백제와 신라의 우호관계에 금이 가고 신라는 고구려와 우호를 다진다. 백제로서는 가야와 왜와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다음 해부터 5년까지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주 전선은 예성강 부근이었다. 당시 양국 사이는 고구려의 일방적인 우세였지만, 예성강선이 양국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광개토왕 6년에 이르자 전통적인 양국간의 전선이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전환은 「광개토왕비문」영락 6년조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광개토왕이 백제를 쳐서 여러 성을 취하고 백제의 국도를 공격하니, 백제왕이 항복했고, 광개토왕은 58성과 700촌을 얻어 고구려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보아서는 안되고, 영락 6년조에 기록된 58성도 즉위 후 5년까지 공취한 성의 수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수묘인연호조에는 광개토왕의 사후 백제에서 차출된 수묘인으로 신래한예가 보인다. 신래한예는 31성과 5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영락 6년조의 58성에 보이는 성 이름들이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58성은 수묘인연호조의 31성과 나머지 27성을 포함한 수이다. 즉 이 58성은 광개토왕 즉위 후 6년에 이르기까지 공취한 백제의 성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수묘인연호조에서 표현된 신래한예가 차출될 수 있는 대상 지역들이었다. 여기에는 ‘百殘南居韓’과 같이 직접적인 전투의 성과물이 아니라, 항복의 대가로 백제로부터 할양 받은 지역의 수묘인도 포함되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영락 6년(396)의 고구려에 의한 對백제전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 2년 뒤부터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약조를 파기하면서 왜와 통교하고, 이를 계기로 고구려에 대한 예속관계에서 벗어났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 뒤 영락 14년(404)조의 대방전투를 보면 백제군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했다고 보여지며, 결과는 왜․백제 연합군의 참패였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당분간 고구려의 우세 에서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