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비해 그 편찬 시기가 빠를 뿐만 아니라, 문헌상 그 모습을 복원하기 어려운 한반도 諸國과 倭 관계 기사가 많다. 특히 『일본서기』 신공 49년조는 한반도 제국과 왜 관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있어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그 결과 근래에는 이 사료가 전하는 대로 신공왕후가 한반도 제국을 정토했다는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는 논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대한 기년 조정을 통해 이 기사를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부자의 대외활동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49년조에 서술된 정토의 실질적인 주체를 찾는 데 역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했다.
우선 세 단락 중 세 번째에 해당되는 ‘磐石’을 매개로 한 맹약의식이 백제의 유습임을 지적해 이 맹약의 실질적인 주체가 백제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백제가 주체가 되어 행한 辟支山(벽중)과 古沙山(고사)의 '磐石之盟'이 근초고왕의 南征에 수반해서 발생한 5읍의 자연항복과 일련의 사건임을 밝혀 5읍을 자연 항복시킨 주체가 백제임을 지적했다. 또한 ‘南蠻’이 백제를 중심에 둔 개념인 만큼 忱彌多禮를 정토한 주체 역시 백제로 간주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한편, 근초고왕대에 이루어진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이 백제와 가야제국 그리고 백제와 신라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우선 신공기와 흠명기에 나타난 기사를 비교․검토함으로서 근초고왕대 백제가 가야에 무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양 지역이 형제의 맹약을 체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백제의 가야제국 정토와 형제의 맹약은 신라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화친관계가 이 시점을 축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따라서 신공 49년조에 나오는 가야제국․침미다례․오읍에 대한 정토 주체는 백제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첫 번째 단락의 신라 정토 문제를 고려할 경우, 『삼국사기』본기 기사를 통해 보더라도 369년 당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때 백제가 신라를 정토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단락의 신라 정토는 백제 계통 사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당시의 일본의 신라에 대한 藩國觀에 기초해 서술된 것임을 확인했다. 요컨대 신공 49년조는 『일본서기』편자가 서로 무관한 내용인 두 번째 단락과 첫 번째 단락을 ‘因以’라는 접속사를 사용해 연결함으로써 두 번째 단락의 백제가 주체가 되어 행한 개별사건이 모두 첫 번째 단락의 신라정토에 이어 나타나는 사건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그 결과 신공 49년조는 왜가 중심이 되어 한반도 제국을 정토한 것으로 서술되게 된 것이며, 두 번째 단락에서 활동한 인물 역시 모두 왜의 명령체계 속에 포함되어 활동한 것으로 서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