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武에게는 이복형제로 他戶皇子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복동생인 他戶가 황태자로 임명되었으나, 桓武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즉 桓武는 왕위 계승 순서에 있어서 부모가 모두 천황가의 피를 잇고 있는 他戶보다 하위에 있었던 것이다.
桓武의 생모인 高野新笠은 원래 和史라고 하는 신분이 낮은 집안 출신이었다. 桓武가 즉위함으로써 이들 가문은 비록 朝臣이라는 황족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가문을 뜻하는 지위를 인정받기는 하지만, 桓武가 죽고 오래지 않아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신분이 낮은 집안으로 분류되고 있다. 또 新笠과 동족인 和朝臣家麻呂가 죽었을 때 그의 평전에서 이 집안이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꼬집고 있다.
이처럼 모계의 혈통이 백제계라고 하는 것은 왕이 되는 데 긍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桓武는 자기 모계가 백제왕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자왕의 직계후손인 백제왕씨를 자신의 외척이라고 하였고, 백제왕씨 가문의 여러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혈통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했다.
한편 新笠이 무령왕의 후손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사실이다. 『속일본기』라는 책에서 무령왕의 태자 純陀의 후손이라고 했지만, 우리측 사료에서는 純陀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桓武가 그러한 사실을 거듭 주장한 이유는, 모계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모계가 한반도의 태양신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자신은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태양신의 계보를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더 이상 天照大神을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중국 황제처럼 태양신이라고 할 수 있는 昊天上帝를 그것도 交野라고 하는 백제왕씨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제사지내기에 이르렀다.
백제왕씨는 화사씨가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환무는 백제왕씨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백제왕씨와 환무가 이렇게 밀착된 이유는 자신의 모계를 백제 왕가로 귀결시키려는 환무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